우연한 산보. 만화책☆이야기

그러고 보니, 낯선 길을 무작적 걸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문득 산책이 하고 싶어지는 만화였다.

쿠스미 마사유키가 쓰고 다니구치 지로가 그린 단편만화 모음, 우연한 산보. 말 그대로 주인공이 우연히 산책을 다니면서 접하게 되는 것들을 아주 디테일한 그림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다소 실없어 보이기도 한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책길로 빠지기도 하고, 심부름을 하다가도 산책을 나서고, 늦은밤, 친구와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산책삼아 걷기도 한다.
'산책을 해야지' 하고 계획하고 나서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다가, 혹은 무언가를 하는 도중에, 무언가를 마친 후에 걷는 걸음이 그대로 산책으로 이어지니,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기나 하고 딴길로 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 주인공의 이런 모습은 실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접하다 보면, 괜히 나까지도 상쾌해진다.
옛 정취가 남아있는 골목길을 누비며 곳곳의 옛스러움에 심취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접하고는 놀라보기도 하고, 추억어린 곳들을 둘러보다 향수에 젖기도 한다.

산책로를 그려낸 그림이 너무나도 디테일해서, 흡사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인공이 걷고있는 길을 정말로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밀한 풍경묘사에, 가보지 않아도 그 거리를 둘러보고 있는 것 같다.
작화가의 노고에 응하기라도 하듯, 거리마다 늘어선 간판들이나 여기저기 써붙여진 문구들은 일본어를 그대로 남겨둔채 주석으로 따로 달아놓은 모습도 보기 좋다. 아마 서투른 솜씨로 간판 글자들을 수정하려 했으면 분위기를 망쳤을 거야.

주인공이 산책을 하며 보고, 겪고, 느끼는 것들을 전달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인물보다 배경이 부각되는, 배경이 더 주인공스러운 만화라 예전, 화실에서 배경 그릴 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새삼 직업병이 돋기도 한다.
당시의 내 실력이었으면 이정도 배경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싶어 한 컷, 한 컷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역시 혀를 내두르게 된다.
배경작업을 하면서 모티브로 삼았던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들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들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모습이다.
그 작가들의 작품들에선 그래도 만화적인 기법이나 약간의 생략, 창작이 있어서 그야말로 잘 그려진 그림을 보는 기분이었는데, 이 작품은 말 그대로 흑백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니까?
그래서 '요즘은 망가스튜디오라는 기가 막힌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면 이정도까지 그려내는 것도 가능하긴 할거야' 라고 생각하며 이 작품 또한 그 프로그램을 활용한 CG작품이라고 판단했는데, 후기를 읽어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너무나도 세밀한 선과, 색과 명암을 나타내기 위해 2중, 3중으로 붙인 스크린톤의 무게로 한층 무거워진 원고지를 언급하는 걸 보면.
놀랄 노자다.
내 예전 배경들도 CG작업을 거쳤으니 그나마 그정도나 디테일할 수 있었지, 수작업 때라면.. 어우~ 손사래가 쳐진다.
 

골목길 곳곳을 안내하던 만화가 끝나면, 만화 본편만큼이나 긴 후기(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후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가 이어진다.
정말로, 가뜩이나 얇디 얇은 책의 2/3만이 본편이고, 후기가 1/3이나 된다.
원작자가 글을 쓰기 위해 정말로 산책을 다니면서 보고 느낀 점들이 사진과 함께 또 하나의 본편처럼 보여지기도 하면서, 나중에는 8편의 단편을 써낼 수 있었던 원작 뒷이야기가 차례차례 이어진다.


일본의 골목길을 그린 만화를 보면서 새삼스레 향수에 빠져본다.
나도 어릴 땐 이골목 저골목 참 많이도 싸돌아다녔는데.. 여기로 가면 뭐가 나오고, 저기로 가면 뭐가 나오고..
한참을 걷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볼거리를 접하게도 되고, 갖가지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 골목길들이 아직도 잘 있을까?. 아니지, 그도안 공사가 워낙 많았으니 이제 어릴 때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진 못하겠네.
친구들과 거닐었던 그 길이 참 재밌고 좋았었는데..
따위의 생각들을 하면서 잠시 책을 내려놓고 그시절 골목길에 빠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목적지 없이 딴길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읽고나면 아주 애틋해지고 개운해지는 기분좋은 만화였다.


덧글

  • 유나 2013/02/21 12:16 # 답글

    전작인 고독한 미식가가 마음에 들었던 저도 구매했지요.
    역시나 좋습니다. 뭐랄까, 여유있는 어른의 기분이에요.
  • TokaNG 2013/02/21 20:44 #

    저도 고독한 미식가도 함께 샀습니다. 뭘 먼저 읽을까 하다가 이게 더 얇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읽었는데, 아주 좋네요.
    고독한 미식가도 덩달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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