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키드의 반란. (베를린) 영화애니이야기

그동안 극장엘 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형수님 손에 이끌려 베를린을 봤다.
개봉과 동시에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요즘 너무 게을러져 있어서 칼퇴근을 하고도 바로 집에 가서 뻗기 일쑤였거든.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라면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보고 반해서 주먹이 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짝패, 부당거래 등 눈에 띄는 건 다 봐왔는데, 새로운 작품을 들고나올 때마다 점점 더 성장해가는 모습에 놀라웠다.
헐리웃 영화를 보며 자라면서 다소 우악스러운 쌈마이 영화만 찍는 것 같더니, 주먹이 운다를 거치면서 부당거래에서 작품에 무게를 싣는 듯 하다가 이번에 제대로 터뜨려냈다는 느낌이 든다.
정말 시종일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그야말로 헐리웃 영화에도 꿀릴 것이 없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

사실 예고편만 봤을 때는 류승완 감독의 액션영화라기에 기대를 하면서도 왠지 본 시리즈나 미션임파서블 등을 어설프게 흉내낸 첩보영화를 들고나오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그 우려는 기우였다. 
화끈하고 스펙타클한 액션이나, 치밀하고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등은 헐리웃의 첩보영화들을 어설프게 흉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뛰어넘은 것도 같다.

이제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공화국(흔히 영화소재로 쓰이던 소련, 이라크 등등이 다 와해되거나 무너지고)중에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북한, 이미 아이언맨 2나 007 시리즈, 솔트 등에서 언급되기도 하면서 미국의 주적으로 비치는 듯 하지만 사실 북한에 대해서 우리나라 감독만큼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는 감독은 헐리웃에도 없을 것 같다.
가장 오랜 기간 북한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가장 많은 사건이 얽혀있는 나라니까.
마침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으로 세대교체가 되는 시점에, 마치 정말로 있을 것도 같은 사안들을 교묘하게 녹여내서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잘 그려냈다.
기존 헐리웃 영화에서 비춰지는 북한은 우리가 보기엔 '저게 뭐야~' 하고 콧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베를린은 달랐다.

2시간의 러닝타임동안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미친 듯이 몰아부치는 전개 덕에 숨이 가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시원하다.
루즈하게 늘어지거나 아리송하게 꼬이는 부분 없이 직절적이고 직접적인 전개가 더욱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내용을 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배우들의 연기 또한 다들 일품이어서 더욱 완성된 영화였지 않나 싶다.
누구 하나 부족함 없이, 과함 없이 정말 캐릭터를 그대로 잘 살려줘서 더 매끄러웠다.
주요인물중 한 명이라도 과잉연기를 선보였다면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도 있었는데, 정말 잘들 해준 듯.

하정우는 이제 정말 보증수표가 된 모양이다.
하정우의 연기가 판에 박혀 식상하다는 사람도 없진 않은 것 같지만, 그의 연기는 언제나 가장 자연스럽고 일품이다.
멜로에서는 멜로인대로, 액션에서는 거기에 맞게, 스릴러에서는 또 얼마나 섬뜩한가?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가장 몸을 많이 써서 정말 힘들었겠다 싶더라.
인상적인 액션씬은 하정우가 다 한데다가, 아파트에서 싸우다가 유리지붕 위로 떨어지는 씬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장면이라 어떻게 찍었을까? 싶기도...
보통은 그런 식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유리를 와장창 깨뜨리며 떨어지는 것에 그쳤었는데, 이 영화는 더욱 디테일하고 아프게 떨어진다. 보는 내가 갈비뼈가 다 욱신거릴 정도로...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근엄한 건달을, 추격자에서는 음산한 연쇄살인마를, 황해에서는 왠지 모르게 누릿한 느낌이 나는 연변 심부름꾼을, 멋진 하루에서는 이 모든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다소 찌질한 남자를 너무나도 능청스럽게 잘 연기했다.
안타깝게 공효진과 찍은 러브 픽션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 영화도 정말 보고 싶다. 
케이블에서 종종 해주는 것 같았는데, 한번도 못 본 영화는 처음부터 보질 못하면 잘 안 봐져서..ㅜㅡ
거기선 또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한석규는, 분명 처음 데뷔했을 땐 부드러운 도시남자 이미지가 상당히 강했는데, 언제부턴가 능글맞고 어떨 땐 징그럽기까지 한 마초맨이 되었다. 음, 마초맨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내 기억으론 구타유발자를 기점으로 사람 이미지가 확 달라진 듯.
넘버 3주홍글씨 등도 좋았지만, 구타유발자들에서의 한석규는 진짜 무서웠거든. 그때의 한석규 이미지가 이후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도 비슷한 느낌이었고.

한석규는 연기도 잘하지만 특유의 그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이라서 더 마음에 든다. 왠지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능글맞게 쌍욕을 날려주면 정말 확 와닿는단 말야.
말 그대로 구타유발자처럼 빈정이 확 상한다. 
어떤 때는 또 여심을 녹이는 부드러운 매력남이 되기도 하니, 정말 탁월한 목소리를 가진 것 같다.
안경은 썻을 때보다 벗었을 때가 더 멋지고.

전지현은 진짜 발군이었다.
도둑들에서도 사람들의 호평을 많이 받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좀 못미친다는 느낌이었는데.. (물론 전지현의 전작들에 비해선 확연히 나아지긴 했지만)
이번에는 도둑들보다 진일보했다.
그동안 전지현에게서 느꼈던 오버스러움을 보일 틈도 없었고, 별 대사가 없을 때에도 예전처럼 마냥 예쁘게만 보이기 보다는 대사 없는 연기를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지현이 보기 싫어서 영화를 건너띈 적도 있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확실히 전지현이 영화에 걸림돌은 되지 않는 듯.
정말 좋아진 연기에 감탄했다.

류승범은, 정말 말이 필요없다.
류승완과 형제라는 것은 뒤로하고서라도, 언제나 자신이 맡은 역할에 어울리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어떤 직업, 어떤 역할이든 류승범이 맡으면 다 똑같아 보이면서도 다 너무 리얼하다.
류승완은 자신의 작품에 친동생이 이렇게나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으니 얼마나 더 뿌듯할까 싶다. 
류승완이 어떤 역을 맡기든, 기대에 부응해서 정말 멋지게 소화해주니까.

류승범도 믿고 볼 수 있는 배우중 하나지.
영화가 망작일지라도 류승범은 항상 잘하거든.


류승완 감독은 이 멋진 배우들과, 치밀한 각본과, 화려한 연출로 헐리웃에 진출하지 않고도 헐리웃을 거의 따라잡았다.
헐리우드 키드가 보란 듯이 해냈다.
음, 만화로 치면 토리야마 아키라를 동경해서 만화가가 되었다가, 이제는 그를 위협할 위치에까지 오른 오다 에이치로 처럼...

영화 말미에 너무 대놓고 속편을 기대하게 만들던데, 정말로 만들어져 나온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누구나가 그렇게 예상하듯이, 제목은 블라디보스톡쯤 되겠지.

덧글

  • 김정수 2013/02/12 08:18 # 답글

    팬층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몰이가 될만한 영화였죠.^^
    역시 악역이 잘해줘야 모든 작품이 산다는..
  • TokaNG 2013/02/13 22:23 #

    정말 팬층이 두터운 배우들이 한데 모여 제몫을 톡톡히 해내 훌륭한 시너지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변에 물어보니 그다지 재미없었다는 사람도 더러 있어서 놀랐네요.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정말 힘든 것 같아습니다.
  • 알트아이젠 2013/02/12 10:31 # 답글

    만족스러운 영화인데 표절설이 돌고 있어서 조금 신경쓰입니다.
  • TokaNG 2013/02/13 22:27 #

    사실 저는 표절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편입니다.
    사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소재는 의외로 제한적이고,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최초일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중요한 것은 같은 소재, 혹은 비슷한 소재로 얼마나 더 재밌게 만들어내느냐가 관건.
    만화도, 영화도 점점 소재고갈인 것에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래도 만화는 표현할 수 있는 폭이 영화보다 넓으니 아직 꾸준히 새로운 장르가 나오고 있지만.

    대놓고 똑같이 베낀 것만 아니라면 표절설은 그야말로 입가심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 남선북마 2013/02/13 22:47 # 답글

    하정우의 액션연기가 뛰어나다는것을 황해에 이어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이제는 액션에 이골이 난듯한 모습이던군요.
    류승범에 대해서는.. "류승완이 어떤 역을 맡기든, 기대에 부응해서 정말 멋지게 소화해주니까."라는 말에 "멋지게 양아치화 시켜서 소화해주니까"로 덧붙이고 싶네요.ㅎㅎ
    타고난 생활연기같아요.. 검사역을 시켜도 양아치화..ㅎㅎ
  • TokaNG 2013/02/13 22:52 #

    정말 류승범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가 진짜 양아치인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죠.
    진짜 양아치인지 아닌진 직접 만나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 성격이 가장 대두되는 작품이 '주먹이 운다' 였습니다. 품행제로도 비슷한 캐릭터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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