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낼게 뻔하잖아. 그냥그런이야기

부산에 있던 화실이 일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따라 올라와서 낯선 땅에 아는 사람 하나 없던 2003년의 겨울.
낯도 많이 가리지만 보기보다 외로움도 많이 타서 매주말이면 부산에서 함께 다니며 어울려 놀던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것만이 낙이었는데, 어느날은 누나가 전화 받는 목소리가 다소 퉁명스럽더니 갑자기 짜증을 버럭 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잘 지내는지 못 지내는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연락 안해도 잘 지낼게 뻔하잖아?!"

그리고 뚝 하고 끊어진 전화.
그 후로 그 누나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그 말이 트라우마가 되어 한동안 누구에게도 전화를 감히 하지 못했다.

괜히 전화를 걸어서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진 않을까, 좋지 않은 타이밍에 전화를 하면 안되는데, 이 친구한테는 전화한지 얼마나 되었더라?, 이시간이면 자고 있으려나??, 전화를 받으면 뭐라 말하지?

이것 저것 재다 보니 점점 더 전화를 할 수 없게 되어서 점차적으로 멀어지고 잊혀진 사람도 하나 둘 늘어가고, '그래, 걔네들도 내가 연락 안해도 잘 살겠지 뭐..' 하며 전화번호를 하나 둘 지우다 보니 이제 휴대폰에 남은 전화번호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남은 전화번호중에도 종종 전화를 거는 번호는 극히 제한적이고..


그 누나는 갑자기 왜 그랬을까?
스무살에 처음 만나서 매일같이 함께 다니며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군대에 갔을 땐 편지도 종종 보내오고, 제대를 하고서도 자주 만나서 어울려 우리를 아는 친구들은 친남매 같다며 부러워 하기도 했는데..
일산에 올라간다고 할 때에도 아쉬워하며 잘 지내라고 손을 꼬옥 잡아주고, 올라와서도 한동안은 일상얘기들을 나누며 별일 없이 잘 지냈는데..

왜 크게 다투거나 빈정상한 일도 없이 한순간에 돌변해서 저런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을까? 하고 아직도 생각하면 답을 찾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한다.
그렇게 잘 지내던 사람이 한순간에 남이 되어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나 싶어 누구에게 안부전화 한 통 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지더라.

안부전화는 얼마만에 한번 해야 적당한 거지? 하고 날짜를 헤아리게 되고, 매번 멘트가 같아서 질린 건가? 싶어 억지로 다른 인삿말과 다른 물음을 생각해내고, 통화를 너무 오래 하는게 실례인 건가? 싶어 정말 안부만 딱 묻고 끊게 되고..
그런 식으로 주변의 사람들과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가더라.


잘 지낼 게 뻔하잖아.
벌써 9년이나 지난 저 멘트를 얼마전에 또 들었다.

"넌 왜 연락 한번 없이 그리 무심하냐?"

"연락이 없는게 당연하지. 연락이 없을 수록 잘 지내고 있을게 뻔하잖아."

"..."


역시 아무래도 남자랑 여자랑은 사고방식이 다른가봐.
남자들은 안부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어째 (몇몇) 여자들은 안부전화 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거지?


"잘 지낼게 뻔하잖아."

물론 그렇겠지.
내가 전화 한 통 안 한다고 해서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하늘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죽거나 다치지도 않겠지.
내가 전화를 하던 말던, 내가 너를 알던 말던, 내가 살아있던 말던 너는 너대로 잘 살게 분명하겠지.

그런데, 아는 사이라면, 더욱이 친한 사이라면, 그리고 멀리 떨어져있다면 안부가 궁금한 건 당연하지 않아?
그게 일주일만이든, 사흘만이든, 아니 하룻만에라도, 몇 시간, 몇 분만에라도...



잘 지낼게 뻔하다는 말..
은근히 잔인한 말.
아직도 저 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사람이 내 전화를 반가워 할까?' 하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는 사람에겐 안부전화 한번 못 하고 있다.



덧글

  • 그라나다 2011/11/01 05:28 # 삭제 답글

    저는 그 누님의 기분을 이해할수 있을거 같아요. 잘지내? 한번봐야지? 이런 말 정말 싫어하거든요 주기적으로 저런말 듣는게 너무 스트레스라서 멀어진경우도 있네요. 주로 제가 연락을 무시하면 그쪽에서도 지쳐서 연락이 끊기는 상황.. 이게 성별차는 아닌거 같구요. 예민한 사람들이 그런편인거 같네요. 예민한 사람중에 여자가 많을뿐.ㅎ 저의 경우 안부가 정말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뭐뭐 하다가 니 생각이 났는데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더라고" 식으로 연락을 합니다 "잘지내?" 이말 자세히 보면 사람에 따라선 좀 기분 나쁜 말일수도 있어요 ㅎㅎ
  • TokaNG 2011/11/04 20:48 #

    얼마나 상대방과의 관계를 하찮게 여기셨으면 싫은 말을 싫다고 말하지도 않고 연락을..
    그렇게 생각하니 누나와 저와의 관계도 하찮게 느껴져서 아주 감사하네요.
    그런식으로 하찮은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거였구나...
  • 다능 2011/11/01 10:04 # 답글

    저도 친하게 지내던 여자인 친구에게 메신저로 계속 안부묻고 잡담하다가 어느날 귀찮다는 식으로 대꾸 와서 트라우마.... 그 이후 서로 연락 끊었음...
  • TokaNG 2011/11/04 20:50 #

    싫으면 싫다고 하던가, 뭔가 뉘앙스라도 풍기던가, 어제까지 웃다가 갑자기 바이바이라니 여자들 참 무섭습니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자기는 그동안에 연기해가면서 준비 다 마쳐놓고.
  • ChronoSphere 2011/11/02 01:11 # 답글

    그래서 친한 친구나 후배들에게 오랜만에 연락할때는
    "살아있냐" 혹은 "안죽었냐" 라고 물어봅니다

    과연 잘지내냐는 말에 정말로 잘지낸다고 답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런지...

    저한테 잘지내냐는 연락이 오면 고민을 좀 하죠
    전화상이라면 정말이지 순간 버벅거리면서 답을 바로 할수 없습니다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리가 없잖아...'
  • TokaNG 2011/11/04 20:53 #

    사실 정말로 '잘지내?' 라고 말하지도 않죠.
    몇 달만에 전화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만인데..

    오늘은 제가 '잘 지내요?' 라는 말을 들었지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잘 지낸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 지내고 있는 거에요.
    안타깝게도..
  • 리크돔 2011/11/02 16:12 # 답글

    저는 연락할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전화하면 "전화를 다하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지냅니다... =_ =;;;
  • TokaNG 2011/11/04 20:53 #

    저도 보통은 그러고 지내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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