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물건이다. 그냥그런이야기

우리가족은 안타깝게도 타인의 물건을 아껴줄 줄 모른다.
어릴 때부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큰형과 작은형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심지어 조카녀석까지 말썽이다.

내 물건이다.


오늘도 조카녀석이 한차례 내 책상을 휩쓸고 지나갔기에 한소리 하며 거실로 나가니 큰형이 대뜸 그런다.

"니방이 뭔데? 왜 조카가 들어가면 안되는데?"

"내 물건이 자꾸 망가지나까 그러지."

"4살배기 조카가 물건 좀 망가뜨릴 수도 있지, 그게 그리 못마땅하나? 애가 이제 4살이다. 아버지 말도 안 듣는 애구만 물건 좀 망가진다고 조카한테 뭐라 하나? 나는 니 사고방식이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물건이 망가지면 고치면 되고 부서지면 버리면 되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

중요하다.
망가지고 부서지는 건 큰형 물건이 아니고, 조카 물건도 아니고 내 물건이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 모셔놨던 추억의 장난감이고, 내가 감명깊게 읽어서 사모은 만화책이고 내가 재밌게 봐서 모아둔 DVD들이다.
선물받은 피규어고, 선물받은 장식품이고, 역시나 선물받은 인형이다.

나 자신의 추억과 타인의 정성이 깃든 내 물건이다.
그래서 아끼는 것 뿐이다.
망가지는 게 싫으니까, 버려지는 게 싫으니까.

내가 형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간다.


우리가족은 타인의 물건을 아껴줄 줄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용돈을 모아 하나 둘 사모았던 장난감을 해마다 몇 박스씩 거침없이 내다 버리셨고, 심지어는 만화책을 눈앞에서 불살라버리기도 하셨다.
타인의 취미용품을 전혀 아무 거리낌 없이 말소시키면서 자신의 낚싯대 하나, 미끼 하나엔 그렇게나 애지중지 하신다.
하다못해 어릴 때 장난치다가 낚싯줄 하나라도 엉키거나 끊어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두르려 맞고 혼났다.
자신의 물건은 그렇게나 소중하면서 타인의 물건은(아무리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렇게나 함부로 처분해버리신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자란 큰형과 작은형도 마찬가지다.
내 책을 빌려주고 안 받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 산 음반 역시 남에게 줘버린다.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내가 산 것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의사따윈 중요치 않다.
자신이 귀찮으면 안 받는다. 자기 손에 집히고 남이 탐내면 다 줘버린다.
어머니 역시 청소를 하시다 당신의 눈에 밟힌다고 내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물건을 함부로 버려서 곤혹을 치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한번은 정말 중요한 자료를 함부로 버리셨다가 내가 크게 화를 낸 뒤론 내방 청소를 하지 않으시지만.
적어도 책상 위의 물건은 쓰레기가 아니라 모두 어딘가에 쓰일 것들이란 걸 몇 번이고 말씀 드렸음에도..


항상 내 물건만 그런 취급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그래서인지 난 내 물건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애지중지 하는 내 물건을 내가 아끼는 것이 그렇게도 잘못된 일인가?
내 물건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망가뜨리는 조카를 내방에서 몰아내는 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한 일인가?

"애니까 뭐 어때."

애니까 내 물건을 함부로 해도 난 아무 소리 하지 말라고?

누차 말하지만 내 물건이다.
나의 추억과 타인의 정성이 깃든 내 물건이다.
큰형의 눈에는 그저 그런 장난감 하나, 인형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추억이고 정성이다.
그래서 애지중지 아껴오던 내 물건이다.
그걸 망가뜨린 장본인이 애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기 힘든 것이다.
한두번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새에 사라진 추억의 장난감들과,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들과, 내 콜렉션들이 몇 개인지.


"여기 있던 내 물건 어디 갔어요?"

"어, 그거 태관이가.."


태관이가 그랬다는 말 한마디면 난 꾹 참고 넘어가야 한다.
여태까지 그래오다 최근 들어 점점 잦길레 좀 버럭했다.
그리고 큰형에게 혼났다.

"그깟 물건 망가지면 새로 사면 되지."


그깟 물건 망가지면 새로 산다고 되지 않는다.
우선, 이제는 희귀품이 되어버린 물건도 많은데다, 어쩌다 같은 물건을 산다고 해도 추억과 정성이 깃들어 오진 않는다.

이미 '그깟' 물건이 아니다.

그깟 내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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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깡이 窮狀 茶飯事♠ : 조카의 존댓말. 2010-06-07 00:50:43 #

    ... 항상 나만 보면 으르렁대는 조카녀석이 또 슬그머니 내방에 들어와서 기웃거린다.이제는 내 물건에 손을 대든 말든 케세라세라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내가 하던 것만 하고 있었는데..'삼촌, 이걸로 비행기 접어줘.' 하며 낙서가 마구 그려진 이면지를 들고와 여느 때와 같이 ... more

  • ♠또깡이 窮狀 茶飯事♠ : 소장품, 소모품. 2011-07-11 00:53:44 #

    ... 능아야, 저능아."하여튼, 그렇다.문화매체를 책이나, DVD나, 음반으로 '소장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부모님 뿐만 아니라, 형들 또한..그러니 항상 물건을 소홀히 여겨 이런 포스팅이나 하게 하고.내가 아무리 애지중지 아껴봐야 말짱 헛일이다. 가족의 손에 들어가는 날에는 안위를 걱정해야 할 정도니.;;똑같이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책을 즐겨 ... more

덧글

  • 이지리트 2010/05/29 22:30 # 답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폭풍같이 집안을 제대로 뒤집어놔야 합니다.
    저도 그런식으로 제 취미생활에 관해 부모님이 신경안쓰게 했었지요...
  • TokaNG 2010/05/31 20:51 #

    그랬다간 집에서 쫓겨납니다.
    겨우 장난감 따위에 난리냐고.
    그런게 통하는 집안이 있고 안 통하여 되려 몰매를 맞는 집안이 있습니다.
    우리집은 후자.
  • issure 2010/05/30 11:02 # 답글

    저희 집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앞가림만 제대로 할 줄 알면 취미나 취향은 존중해주시는 편이라서....

    확실히 이런쪽 취미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은게 현실이긴하지요....
  • TokaNG 2010/05/31 20:55 #

    건프라 취미 이전에, 모든 물건들에 소중히 아낀다거나 애장한다거나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냥 망가지면 고치고 부서지면 버리는 것이 진리.
    '소장한다'라는 인식이 없어서 책이나 DVD를 사면 미친 짓입니다.
    한번 보면 버릴 걸 왜 사냐고.
    거의 모든 용품들의 일회용화.
  • Reibark 2010/05/30 19:14 # 답글

    형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값이 제대로 나가는 물건 하나, 둘 정도 부셔버리세요. 그리고 형님게서 뭐라고 하시면

    "웁스. 미안. 실수였어. 물건이야 또 사면 되지. 설마 사랑하는 동생이 이깟 물건 하나 실수로 부셨다고 마음 상해 하는 것은 아니겠지. 형님이니까 이정도야 또 살 수 있지?"

    로 시작해서 한판 붙으세요. 한번해서 상대방이 상황을 파악 못하면 한 두번 더하면 됩니다. 포인트는 마음을 굳게 먹는다는 점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시면 하지 않하는 것만 못합니다.
  • TokaNG 2010/05/31 20:56 #

    그랬다간 제 목숨이 달아납니다.
    큰형은 물건 한두개를 잃지만 저는 목숨을 잃습니다.
    ㄷㄷㄷ...

    이전에, 큰형에게 과연 그정도의 애착이 있는 물건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 페리도트 2010/05/31 21:22 # 답글

    참 이건 고민이 많은 문제입니다. ㄷㄷㄷ
    자기물건에만 애착이 있고 자식 동생 물건엔 함부러 다뤄도 된다는 인식이 너무 깊게 박히신거 같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ㅠㅠ
    위에분들과 같은 방법을 말씀드리려다 안된다는 답변을 보고 또 ㅠㅠ
  • TokaNG 2010/06/01 21:20 #

    그냥 혼자 끙끙 앓고 말랍니다.
    그러다 가끔 이렇게 푸념이나 해보고..
  • 쥐나 2011/07/11 16:52 # 답글

    독립하셔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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